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막시밀리안 율리시즈 폰 브라운 (문단 편집) === 7년 전쟁 === 1756년 프리드리히 대왕이 작센 침공을 감행해오자, 브라운은 보헤미아에서 즉시 병력을 집결시킨 뒤 피르나에 포위된 작센군을 구원하고자 진군을 개시했다. 이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를 막기 위해 작센군을 포위한 일부 병력을 제외한 나머지 병력을 규합했고, 양측은 10월 1일 [[로보지츠 전투]]를 치른다. 브라운은 이 전투에서 우수한 지휘 능력을 발휘했고, 프리드리히 대왕은 여러 차례의 기병 공격이 통하지 않자 "이들은 이전과 같은 오스트리아군이 아니다."라고 말하며 자신이 패배했다고 여겼다. 그러나 대왕으로부터 지휘권을 위임받은 키스 공작 [[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]]가 역습을 감행한 끝에 마침내 승기를 잡아냈고, 브라운은 어쩔 수 없이 후퇴해야 했다. 하지만 그는 철수 과정에서도 아군의 전력을 보전하는 데 힘을 들였고, 프로이센군은 감히 그들을 추격하지 못했다. 이후 브라운은 다시 피르나에 포위된 작센군을 구하기 위해 엘베 강의 반대편 둑에 있는 샨다우로 진군했으나 작센군이 항복해버렸다는 소식을 듣자 보헤미아로 철수했다. 1757년 로트링겐 공작 [[카를 알렉산더]]는 브라운을 밀어내고 육군 원수가 되어 오스트리아군의 최고 지휘권을 맡았다. 브라운은 이에 크게 좌절했지만 그래도 국가를 위해 그의 밑에 들어가는 걸 감수하기로 했다. 5월 6일, 결핵 말기였던, 브라운은 [[프라하 전투]]에서 아군의 우익을 지휘해 프로이센군을 상대로 대단히 잘 싸웠다. 그러던 중 프로이센군의 명장 [[쿠르트 크리스토프 폰 슈베린]]이 전사해 프로이센군이 동요하자, 브라운은 이 틈을 타 공세를 개시하려 했다. 바로 그 순간, 어디선가 날아온 포탄 하나가 그의 다리를 날려버렸다. 그는 후방으로 후송되었고, 그가 중상을 입은 것을 목격한 오스트리아군은 격분한 나머지 적을 향해 무질서하게 돌격했다가 적군에게 측면을 찔러 무너지고 말았다. 브라운은 이 전투의 패배 책임을 떠안긴 채 향년 52세의 나이로 6월 26일 프라하 요새에서 숨을 거뒀다. [[분류:오스트리아의 군인]][[분류:1705년 출생]][[분류:1757년 사망]][[분류:전쟁 사망자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